이졸데 카림, <나와 타자들>

정체성 다원화의 역설: 나는 뭐든지 될 수 있지만 무엇으로도 나를 부를 수 없다

by Husky

Aug 3, 2020 | 6 min 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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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에서는 혐오 현상을 이해하게 해주는 책이라고 했는데, 실제 본문은 보다 다양한 사회적 영역에서 현대인의 정체성 혼란의 원인을 추적하고 있다. 코로나 시대를 위한 최신 버전의 사회학 모델.

최근 10년 간 전 세계에서 공통적으로 불거진 정치 이슈는 민족주의로의 회귀였다. 트럼프는 ‘자국 우선주의’ 정책을 내세우며 멕시코 이민족들을 막기 위한 장벽을 세우고 중국과 무역 전쟁을 치렀다. 유럽에서는 중동 출신 난민들이 늘어나면서 이슬람 문화와의 충돌을 경험하고 있고 난민들을 쫓아내자는 목소리도 점차 높아지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유로존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영국은 유럽연합을 탈퇴하는 이른바 ‘브렉시트’를 선언했다. 2차 대전 이후 올곧게 이어졌던 세계화 흐름이 어째서 뒤집히기 시작했는지 모두가 의아해하고 있는 지금, 오스트리아 출신 철학자 이졸데 카림은 <나와 타자들>을 통해 현대인과 현대 국가들이 어떤 원인으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는지 ‘다원화’라는 키워드를 들어 명료하게 서술한다. 6주에 걸친 라디오 강의를 엮은 이 책은 각 챕터마다 종교, 포퓰리즘, 정체성 정치 등 한 가지 이슈를 주제로 삼아 다원화에 따른 변화 양상을 소개하고 있다.

정체성 다원화의 역설: 나는 뭐든지 될 수 있지만 무엇으로도 나를 부를 수 없다

우리는 어른들이 종종 “시대가 많이 좋아졌다”고 말씀 하시는 걸 듣는다. 대중교통과 인프라가 깔끔하게 갖춰진 도시, 수많은 먹을거리와 놀 거리, 정치적 자유 등 부모님이 젊으셨을 때보다 오늘날 ‘좋아진’ 것들은 무척 많다. “좋아졌다”는 말은 한편으로 ‘자유로워졌다’는 해방의 선언으로 들린다. 독재 정권, 가난, 가부장적 사고방식에서의 자유. 하지만 정작 젊은 세대는 사상 최악의 출산율을 매 해마다 경신한다. 20대 남자들은 ‘일베’ 커뮤니티로 집결하여 역사의 유물이 되어버린 박정희, 이승만의 시대를 그리워하는 극우적 성향을 보인다. 어째서일까? 지금 이 2020년대가 정말 좋아진 게 맞다면, 어째서 부부들은 출산을 포기하고 20세기 독재 정치를 그리워하는 걸까?

<나와 타자들>은 한국에서 불거지고 있는 사회 분열의 조짐이 세계 모든 국가에서 똑같이 벌어지고 있다고 말한다. 근본 원인은 ‘다원화’이다. 다원화란 19세기 시민사회가 등장한 이래로 국가가 국민들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통합시키려 기획했던 민족적 정체성, 국가 종교가 자연스럽게 제공해주던 정체성, 각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 등등 모두가 본래적이고 절대적이라 믿어왔던 사회적 자아가 개인주의의 등장으로 절대성을 잃어버리고 축소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는 상대화라는 개념과는 다르다. 상대화가 주류의 다수성이 확보된 상태에서 소수의 가치들이 논의되는 것이라면 다원화는 주류와 비주류가 똑같이 소수화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그리고 저자는 단언한다. 이제 다원화는 피해갈 길이 없는 기정사실이라고.

다원화 사회로 넘어오기까지 개인주의는 3단계의 변화를 겪어 왔다. 180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이어진 1세대 개인주의는 국가가 국민들을 시민 사회 공동체로 편입되게끔 교육하고 추상화하면서 만들어졌다. 귀족 혹은 농민 등 여러 신분제로 갈라져 있던 사람들을 하나의 국민으로 동질화시키기 위해 국가는 민족주의라는 환상을 주로 사용했다. 1960년대 이후 개인주의는 2세대로 이행되기 시작한다. 이제 개인들은 국가나 종교 등 거대한 공동체를 통할 필요 없이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취향, 소비하는 매체 등을 중심으로 더 작은 규모의 자기 정체성을 확보하게 되었다. 1세대 개인주의가 거대 조직에 의해 개인이 변화되면서 성취되는 것이었다면 2세대 개인주의는 ‘지금 이 자리의 나’가 있는 그대로 인정받는 방식으로 성취되었다. 내가 성소수자라면 성소수자라는 정체성 그대로 존중받아야 하며 가톨릭이 아니라면 다른 종교를 믿는 것 자체로도 나 자신을 규정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3세대 개인주의, 곧 다원화는 여기서 또 다른 변화를 겪게 된다. 1, 2세대 개인주의가 보다 진보한 정치적 상태로 나아가기 위한 목적성을 갖고 있었던 것에 반해 3세대 개인주의는 “목적 없는 변화가 낳은 효과(55p)”다.

58p. - 다시 한번 세 개인주의를 살펴보자. 1세대 개인주의에서는 주체의 변화가 중요했다. 왜냐하면 본질적으로 교육 기관들을 통해 수행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관들은 주체를 변화시키려고 했고, 대부분 규율을 통해 작동했다. 이와 반대로 1960년대 이후 출현한 2세대 개인주의에서는 성별이나 성적 지향성같이 자신의 정체성을 위해 본질적으로 선택된 특징과 함께 주체를 바꾸지 않는 게 중요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는 본질적으로 개인의 표현이 중요했고, 중요하다. 이와 반대로 3세대 개인주의(다원화 개인주의)는 개인의 분열, 우연성의 경험, 불확실의 경험, 원칙적인 개방성 등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3세대 개인주의는 우연이라는 요소가 심장으로 진입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연성에 대항하는 데서 생명을 얻는 정체성의 심장에 바로 이 우연성이 들어왔다. (여기에서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하는 것은 세 개인주의가 강조점과 주도권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구별되는 무게로 오늘날에도 동시에 나란히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61p. - 한 교실에 무슬림 학생 옆에 유대인 학생과 무신론자 학생이 앉아 있고, 이민자 학생 옆에 비이민자 독일 학생이 앉아 있다면, 여기 있는 모든 학생들이 저마다 변한다. 혼종 정체성 같은 혼합된 형태가 필연적으로 나타나서가 아니라, 혼합보다 더 근본적으로 기존의 정체성이 변하는 것이다. 오늘날 모두가 타자와 이웃이 다른 정체성을 지니고 있음을 인식하면서 각자 자신의 정체성을 경험한다. 이 경험은 정체성의 당연함을 빼앗는다. 원래의 정체성을 축소시키고, 원래의 정체성이 여러 개 사이에 놓인 하나의 선택지에 불과함을 알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다원화는 우리 각자의 정체성을 감소되고 공제된 정체성으로 우리 안에 기록한다. 이런 의미로 우리 모두는 이미 작아진 자신의 불안정한 정체성을 각자 보호하고 증명해야 한다.

개인의 정체성과 자유를 국가가 억압하고 규정하는 시대도 지나고, 이데올로기가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냉전의 시대도 지났다.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기 생존과 생활의 과정을 오로지 자기 상품화라는 무기로 헤쳐나가야 하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선 “나는 누구인가”를 결정짓는 정체성의 문제까지도 개인의 몫으로 떠넘겨졌다. 이제 정체성은 당연히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여러 가치 체계 중에서 몇 가지를 선택해 홍보해야 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다원화의 시대에서는 2세대 개인주의 시대처럼 비주류의 정체성이 주류 정체성으로 편입되기 위한 투쟁이 가능하지 않다. 주류 정체성 자체가 함몰되며 민주주의 자체가 중심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이제 국가는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공통의 정체성을 제공할 수 없다. 국가는 모든 정체성의 흔적이 벗겨진 ‘중립성’만을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